죽헌고택: 시간과 사람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공간

늦가을 오후, 장흥 관산읍의 죽헌고택을 찾았습니다. 바람이 느리게 흐르는 시골길을 따라가다 보면 낮은 돌담 뒤로 단정한 기와지붕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햇빛이 서쪽으로 기울며 지붕의 윤곽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고, 마당 너머로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가 한적한 분위기를 완성했습니다. 죽헌고택은 조선 후기 학자 가문의 주거로, 오랜 세월 동안 지역의 정신적 중심 역할을 해온 곳입니다. 담장 안으로 들어서자 흙길이 이어졌고, 바람이 문살 사이로 스며들며 나무향이 은근히 퍼졌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정제된 형태,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온기가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1. 관산읍 외곽의 조용한 입구

 

죽헌고택은 관산읍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2km 떨어진 언덕 마을에 있습니다. 도로는 좁지만 포장이 잘 되어 있어 차량 접근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입구에는 ‘죽헌고택’이라 새겨진 돌표석이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주차는 고택 앞 공터에 가능했고, 마당까지는 짧은 흙길이 이어졌습니다. 돌담 사이로 보이는 기와지붕이 균형감 있게 자리 잡고 있었고, 바람이 지나가며 담장 위 낙엽을 살짝 흩날렸습니다. 도심과 멀지 않지만, 이곳의 공기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길을 걷는 동안 들려오는 건 새소리와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뿐이었습니다. 단정한 첫인상에서 이미 오랜 시간의 품격이 느껴졌습니다.

 

 

2. 마당과 건물이 만들어내는 안정된 조화

 

죽헌고택은 ‘ㅁ’자형 구조로,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별채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기둥의 배흘림이 자연스럽게 잡혀 있어 건물 전체가 유려하게 이어졌습니다. 사랑채는 마루가 높고 창이 넓게 트여 있어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들었으며, 바닥을 밟을 때마다 나무의 울림이 조용히 전해졌습니다. 안채 쪽은 상대적으로 낮아 가족들의 생활공간이 아늑하게 느껴졌습니다. 부엌의 아궁이는 여전히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고, 천장에는 그을음이 얇게 남아 있었습니다. 마당 한가운데는 오래된 우물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돌테의 표면이 손으로 닳아 반들거렸습니다. 공간의 짜임새가 단단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흘러, 조선 후기 주거의 미학을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3. 죽헌고택의 역사와 건축적 가치

 

죽헌고택은 19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장흥 지역의 대표적인 유교 가문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산입니다. ‘죽헌(竹軒)’이라는 이름은 ‘대나무처럼 곧고 맑은 뜻을 지닌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집의 기단은 낮지만 단단하게 쌓인 화강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재의 짜임이 정밀하게 맞물려 있습니다. 서까래의 결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며, 처마의 곡선은 남도 한옥의 부드러운 미를 잘 보여줍니다. 내부의 기둥은 붉은빛을 띠며 옻칠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문살의 무늬는 간결하면서도 정제되어 있었습니다. 이 집은 단순한 옛집이 아니라, 장인 정신과 생활의 철학이 오롯이 녹아 있는 건축의 기록물입니다.

 

 

4. 생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정겨운 디테일

 

고택의 구석구석에는 사람의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장독대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른 항아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위로 오후 햇살이 비쳐 반짝였습니다. 대청 한쪽에는 오래된 붓과 벼루가 남아 있었으며, 벽면에는 희미하게 퇴색된 족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부엌에는 나무로 된 뒤주와 돌절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마루 끝에는 대나무 빗자루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마당 옆의 작은 정자에서는 바람이 살짝 불 때마다 기와 아래 풍경이 맑은 소리를 냈습니다. 공간은 오래되었지만 정리가 잘 되어 있었고, 모든 요소가 과하지 않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세대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쌓인 모습이 오히려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5. 주변의 역사 길과 함께 즐기는 여정

 

죽헌고택을 둘러본 뒤에는 도보로 5분 거리의 ‘관산향교’를 찾았습니다. 낮은 담장과 고목이 어우러진 향교의 분위기가 고택과 닮아 있었습니다. 이어서 차량으로 10분 정도 이동해 ‘보림사’를 방문했는데, 천년 고찰의 고요함이 하루의 여정을 차분하게 이어줬습니다. 점심은 관산읍 중심의 ‘죽헌식당’에서 된장정식을 맛보았습니다. 된장의 깊은 향이 여운처럼 남았고, 마을 사람들의 정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었습니다. 오후에는 ‘탐진강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강바람을 맞았습니다. 고택에서 시작된 하루가 역사와 자연, 그리고 사람의 온기로 마무리되었습니다.

 

 

6. 방문 시 알아두면 좋은 팁

 

죽헌고택은 상시 개방되어 있으며, 입장료는 없습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이 가능하지만, 제례일에는 일부 구역이 출입 제한됩니다. 내부는 목재 구조물이 많으므로 우천 시에는 마루가 미끄러울 수 있습니다. 사진 촬영은 가능하나, 가구나 기둥에 손을 대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봄에는 대나무숲이 새순으로 푸르게 물들고, 가을에는 담장 위 감나무가 붉게 열매를 맺습니다. 주차는 고택 앞 공터를 이용할 수 있으며, 평일 오전이 가장 한적합니다. 오래 머무를수록 공간의 세밀한 디테일이 눈에 들어오므로, 느긋한 마음으로 천천히 둘러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마무리

 

죽헌고택은 조용한 마을의 시간 속에서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온 집이었습니다. 기와 위로 비치는 햇살, 나무의 향, 바람의 속도가 모두 이 공간만의 리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단아하고 정갈한 구조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세월의 무게와 동시에 사람의 따뜻함을 전해줍니다. 대청에 앉아 들려오는 새소리를 듣다 보면, 마치 집이 스스로 숨을 쉬는 듯했습니다. 다음에는 봄의 초록이 짙어질 무렵 다시 찾아, 대나무가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고택의 또 다른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죽헌고택은 장흥의 품격과 정서를 고스란히 담은, 살아 있는 국가유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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